<제인에어>

“제가 가난하고 어리석고 평범한 여자라고 해서 감정도 영혼도 없는 줄 아시나요?” 제인이 로체스터를 쳐다본다. 도발적이다. 보수적이던 18세기 영국 빅토리아시대, 여성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일은 금지됐던 시절이었다.

샬롯 브론테의 ‘제인에어’가 영화로 또 나왔다. 이 영화의 원작은 1847년 런던에서 출간됐다. 공식적으로 집계한 자료는 없지만 스무 번은 족히 영화화됐다. 스토리는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져 더는 반전도, 궁금할 것도 없다. 그런데 150년이 넘도록 왜 끊임없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일까. 캐리 후쿠나가 감독의 <제인에어>는 명작의 무게를 되돌아보게 한다. 제인에어는 대표적인 스크린셀러(영화+베스트셀러를 합친 것으로 영화화된 소설이라는 뜻)다.

영화는 제인(미와 와시코브스카 분)이 비바람치는 황량한 황무지에서 길을 헤매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로체스터(마이클 파스밴더 분)와의 결혼이 깨진 충격으로 제인은 손필드 저택을 뛰쳐나왔다. 제인은 탈진한 상태에서 세인트 존 목사 집 앞에 쓰러진다. 감독은 이 장면을 그녀의 삶이 새로 시작되는 변곡점으로 본 듯하다.

제인은 어릴 때 부모님을 여의고 심술궂은 외숙모집에서 자란다. 언제나 자기 주장을 당당히 펼치는 제인.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그녀는 ‘못돼먹은 아이’로 치부되며 반항적인 사춘기를 보낸다. 그녀는 손필드 저택의 가정교사가 된다. 당당한 그녀에게 저택 주인 로체스터는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로체스터에게는 집안에 가둬둔 미친 부인이 있었다.

제인과 로체스터의 사랑을 맺어주는 반전은 화재다. 로체스터의 아내 앙트와네트가 어느 날 밤 지른 불로 손필드 저택은 무너져내린다. 재산도, 눈도 잃어버린 로체스터. 제인은 비로소 그를 껴안는다.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닌, 주는 여인으로.

샬롯 브론테가 반전의 소재로 화재를 끄집어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영국인들의 잠재의식 속에는 화재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1666년 9월 발생한 런던 대화재는 런던을 초토화시켰다. 당시 4일간 불탔고, 시내 건물의 85%가 넘는 1만여채가 소실됐다. 이 화재를 계기로 세계 최초의 화재보험사가 생겨난다. 1681년 설립된 화재보험회사(Fire Office)다.

화재보험의 기원은 중세 프랑코 왕조 시대에 만들어진 길드로 거슬러 올라간다. 15세기에는 화재공제만을 목적으로 한 화재공제조합이 독일 북부에서 시작됐다. 1591년 함부르크에서 100명의 맥주 제조업자가 결성한 함부르크 화재보험조합이 특히 유명하다. 세계 최초의 공영 화재보험은 1676년 공제조합들을 통합해 설립한 함부르크 일반화재금고다.

손필드 저택은 저택 주인인 로체스터의 아내가 불을 질렀다. 만약 그가 화재보험에 들었다면 보험금을 받을 수 있었을까.

정답은 ‘그렇다’다. 한때 국내 보험약관은 ‘피보험자와 세대를 같이하는 친족이나 고용인이 일으킨 손해’에 대해서는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2010년 금융감독원은 이 조항을 삭제토록 했다. 대표자 책임이론에 따라 친족이나 고용인이 고의로 낸 화재라도 사안에 따라 보험금을 받을 수 있다는 판례가 대법원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제인에어를 좋아한다면 전작 격인 진 리스의 ‘Wide Sargasso Sea’(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함께 읽어볼 만하다. 제인에어 출간 이후 120년 만인 1967년 나온 이 소설은 가장 성공한 ‘팬픽’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로체스터와 앙트와네트의 만남과 앙트와네트가 미쳐갈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뉴욕 위크가 선정한 세계 최고의 책 50권에 포함됐다. 국내에서는 <카리브해의 정사>라는 다소 선정적인 제목으로 영화가 상영됐다.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my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