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김난도 교수는 거의 매주 '개그콘서트'(KBS2)를 시청한다. 단지 웃겨서만이 아니다. 그 시대 메가트렌드를 정확히 짚어내기 때문이다. "지난해는 우리 사회에 '성공'보다 '행복'이란 가치가 더 중요해지는 전환기였는데, '개콘'에서 '행복전도사'란 캐릭터가 뜨더군요. 가만히 들여다보면 '개콘'에 그해의 주요 트렌드가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럼 올해는? '디테일'이다. 작은 차이, 사소한 공감(共感)을 통한 커다란 변화! 최근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는 개콘의 '생활의 발견', '감수성' 코너가 이와 호응한다. "이별을 앞둔 연인이 슬픔과는 별도로 감자탕을 게걸스럽게 먹어대죠. 여자친구를 쫓아 나가면서도 계산대 옆 박하사탕을 한 주먹 집어넣는 걸 잊지 않습니다. 누구나 하지만 남에겐 들키고 싶지 않은 비굴 요소들이 모여 커다란 웃음이 빵! 소시민들의 일상에 대한 애정 어린 관찰이 없으면 절대 포착할 수 없는 장면입니다."

1999년 9월 첫선을 보인 '개그콘서트'가 다음 달로 600회를 맞는다. 방송 11년, 통상 시청률 20%대다. 그 사이 개콘은 '브랜드'로 도약했다. 일개 코미디 프로가 아니라, 성공 아이콘이자 위기극복 브랜드가 됐다.

개콘의 연출진과 개그맨들은 '웃음경영', '성공노하우'를 주제로 한 특강에 단골 강사로 초청받고, 커뮤니케이션·소비 트렌드·창의성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겐 프로그램 자체가 '연구대상'이다.

성신여대 노동렬 교수(미디어 커뮤니케이션학과)는 기업의 창의성 생산 시스템을 이야기할 때 개콘의 경쟁력을 예로 든다. "적절한 통제 시스템 안에서 경쟁과 신뢰를 둘 다 촉발시키는 개콘의 조직 운영 방식이 창의력의 원천"이라는 것. 노 교수는 개콘의 창의성 생산 시스템이 정치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했다. "정당도 일종의 창조산업이니까요. 좋은 상품(정책)을 만들어내야 보다 많은 유권자를 얻어낼 수 있지 않습니까. 계파에 연연해선 안 되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개콘의 창의적 시스템, 그 핵심 노하우를 들여다보기 위해 아이디어 회의, 오디오와 카메라 리허설 현장에 참여했다.

지난 5일 오후 3시. 여의도 KBS연구동 5동 506호실은 도떼기시장처럼 시끌벅적했다. 개콘 멤버 60여명이 다음 주 대본을 짜기 위한 아이디어 회의 중이다. '생활의 발견'으로 스타덤에 오른 송준근·신보라의 표정도 심각하다. "이번엔 찜질방 어때?" "백화점도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담당작가 홍윤희가 합류한다. "어제 미용실 녹화는 좋더라. 이번처럼 남녀가 사소한 일로 토닥토닥 싸우는 일상개그가 훨씬 재미있는 것 같아." "이번 주엔 뭘 하지? 그림은 치과가 웃긴데." "오락실은 어때? 게임기가 얼굴을 가리지 않게만 연출하면 재미있을 거야." "어디가 됐든 현장에 꼭 다녀올 것. 치과는 스케일링 받을 겸 다들 다녀오고."

구석 자리에서 새 코너 아이디어를 짜고 있는 박지선·오나미가 보인다. 그들에게 '개콘의 성공비결'을 물었다. "이렇게 만날만날 모여서 아이디어 짜는 거요. 오늘은 공휴일(어린이날)이라 조용한 편이에요. 평소엔 꽉 차서 후배들은 앉을 자리도 없어요. 게으름 피우고 싶어도 옆에서 저렇게들 계속 뭔가를 하니까 나도 안 할 수가 없죠. 월화수목금, 매일매일 이래요."(박지선) "평일에 다 못 짜면 주말에도 모여요. 밥 먹으면서 하고 커피 마시러 나가서도 하고. 친구들 만나 놀 때에도 늘 개그 아이디어를 찾으려고 기를 쓰죠."(오나미)

짜인 대본은 주초 연출진의 심사와 리허설을 거쳐 수정 보완한다. 공개녹화(매주 수요일) 현장에서 객석의 반응이 신통치 않으면 이튿날 편집 과정에서 잘린다. 보통 15개 코너를 녹화하지만 실제 방송되는 코너는 12~13개. 서수민 PD는 "아무리 굳건했던 코너여도 녹화현장에서 식상하다는 피드백이 오면 가차없이 편집 대상이 된다"고 말했다. '편집'은 '생계'와 직결된다. 프로그램에서 자기가 맡은 코너가 사라지면 출연료가 없다. 녹화는 했지만 편집이 되면 출연료의 절반만 지급된다.

새 아이디어는 매주 목요일 '새 코너 검사' 때 공개경쟁을 거친다. "한 번에 열 몇 개씩 시험대에 오르죠. 코미디라는 게 드라마와 달리 대본플레이가 아니고 현장플레이라 연출진은 물론 전체 개그맨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경쟁을 시킵니다." '두분토론'의 박영진은 "두 개 이상 코너를 맡고 있어야 안심이 되지, 1개 코너만 하고 있어도 불안하다"고 말했다. 홍윤희 작가는 "대중의 기호가 너무나 빨리 변해서 새 코너도 서너 달을 넘기기 어려울 만큼 수명이 짧다"고 전했다.

한번 스타덤에 올랐어도 매주 새로운 웃음을 선사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뜻. '슈퍼스타 KBS'에서 '세레나 허'로 인기를 끌었지만 소재가 바닥나 얼마 전 '퇴출' 당한 허안나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마지막 방송 때 섭섭해서 술 마셨죠. 하지만 경쟁은 당연해요. 경쟁 없이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겠어요?" 배우들이 먼저 하차 의사를 밝히기도 한다. 독설 캐릭터 '왕비호'로 인기를 모았던 윤형빈은 "더 가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나 스스로가 새로운 캐릭터로 승부를 걸고 싶었다"고 말했다. 서 PD는 "어느 조직이든 악역이 있어야 굴러간다. 미련을 가지면 프로와 배우 모두 죽는다"고 말했다.

살벌한 경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서수민 PD는 "개콘은 시스템의 승리"라고 단언했다. "공채를 통해 선후배로 조직된 유일한 곳이 KBS 희극인실이고 그 안에서 빛나는 팀워크가 이뤄진다"는 것. 월요일부터 금요일 오후 1~6시로 출퇴근 시간을 정해놓은 것도 특이하다. "방송 외적인 활동을 막는 것은 아니지만, 개콘으로의 올인이 원칙이라는 걸 강조하고 있어요."

공동생활을 통한 신·구 결합의 시너지 효과도 크다. '9시쯤뉴스'에서 어린이역을 맡은 김준현은 "선배들과 코너를 하다 보면 '아, 개그는 이렇게 짜는 거구나' 무릎을 치게 된다"고 말했다. 박영진은 '그냥 웃기는 법'과 '폭발력 있게 웃기는 법'의 노하우를 선배들로부터 전수받았다고 했다. "타고난 개인기만으로 폭발적인 웃음을 유발할 순 없죠. 의상·소품·분장 하나하나가 치밀하게 맞아떨어져야 하고, 똑같은 대사라도 어떤 톤으로 처리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리고요."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그 역할을 거머쥐는 것도 아니다. 그 코너에 가장 적역인 인물을 찾는다. '생활의 발견'은 김병만이 낸 아이디어지만 송준근·신보라 커플에게 넘겨 히트상품이 됐다. 선배들은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의 참신한 아이디어에 자극받는다. '감수성'의 김준호는 "6개월 동안 신입 개그맨들 군기 잡고, 2년간 강도 높은 트레이닝으로 연기력을 다지게 한다"면서도 "단, 아이디어 회의는 절대 수평적이다. 선배라고 자기 생각만 고집하면서 무조건 '따라와!' 하면 실패한다"고 강조했다.

서울대 김난도 교수는 "개콘의 탁월함은 생활공감형 웃음을 유발하는 것, 각각의 코너가 타깃 연령대를 달리해 전 세대를 아우르는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굳혔다는 데 있다"고 말한다. 그 비결은 여성 리더십에 있었다.

4일 오후, 개그콘서트 리허설이 한창인 KBS 공개홀. '생활의 발견―미용실 편'에서 송준근이 제 손으로 거울을 들고 연기를 하자 서수민 PD가 지적한다. "미용실에서 남자들은 본인이 손거울 들고 직접 확인하니? 미용사가 해주는 거 아니야?" '발레리노' 리허설에서는 신입단원으로 들어온 송영길에서 제동이 걸렸다. "영길아, 그게 보일까 봐 두려움에 떠는 모습이 더 실감나게 살아야지. 공포가 느껴져야 웃음이 터진다고."

서수민 PD는 한국 코미디 사상 최초의 여성 연출자다. 서PD뿐 아니다. 조연출도 여성, 8명의 작가 중 6명이 여성이다. 남성PD들이 큰 반전으로 승부를 걸었다면 여성 연출자들은 디테일한 대사와 몸짓, 리얼리티에서 공감형 웃음을 유도한다. 홍윤희 작가는 "소셜네트워크만 봐도 예전엔 직설· 독설·안티언행들이 공감을 얻었다면, 최근엔 생활밀착형의 일상 공감, 내밀한 감성의 조우가 대세"라고 말한다.

8명 작가들은 웃음의 다양한 코드를 만들어내는 주역이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몸개그가 있으면 아빠가 좋아하는 콩트 개그, 토크 개그도 있어야 하고, '발레리노' '꽃미남수사대'처럼 아줌마들이 환호하는 코너가 있으면 샐러리맨 남자들 위로하는 '감수성'도 있어야 하지요."

개콘이 기업의 경쟁력을 이야기할 때 단골 소재로 활용되는 것은 '위기'를 통해 진화해온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1999년 처음 방송될 때 개콘은 '도박'이었다. 버라이어티쇼에 밀려 정통 코미디가 존폐 위기에 처해 있던 시절. 하지만 위기를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돌파했다. 개그계의 대모 김미화가 객석과 호흡하는 공개 코미디 무대를 제안했고, 박중민 초대 PD가 연극과 음악적 요소를 가미한 콘서트형 개그 프로를 만들어냈다.

시청률 40%에 육박하는 전성기를 누렸지만 개콘은 또 다른 위기에 봉착한다. 스타급 개그맨들이 다른 방송사로 이적한 것이다. 하지만 공백은 길지 않았다. 주역을 꿰찰 수 있는 인재풀이 넓고 탄탄했기 때문이다. 위기는 오히려 세대교체의 기폭제가 됐다.

가장 최근의 위기는 경쟁사 개그 프로그램의 폐지다. SBS의 '웃찾사'와 MBC의 '개그야'가 폐지되면서 코미디 산업의 기반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 서수민 PD는 "혼자 하니까 솔직히 흥은 안 난다"라면서도 "대신 내부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고 전했다. 윤형빈은 "개콘은 치열한 경쟁조차 즐기게 하는 진정성이 있다"면서 "돈이나 명예 이전에 '저 무대에서 정말 웃기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치게 하는 신뢰의 브랜드가 됐다"고 말했다.

홍윤희 작가는 개콘의 생명력과 달인의 생명력에는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달인'은 위기 때마다 새로운 걸 들고 나와 관객을 감동시키죠. 전통적인 몸개그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전 연령대가 좋아하는 장인(匠人) 개그로 진화했고요. 개콘도 같습니다."